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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도시를 위한 다채로운 사례들을 연재합니다

느리게 세심하게 기록하는 사람들

최대혁 OO은대학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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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대혁(루타) OO은대학연구소 대표  


도시재생이 한창 진행 중이던 201812월 세운상가 주변의 재개발이 시작되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충격을 받았다. 도시재생을 하면서 세운상가를 메이커 시티라 명명해놓고, 정작 그 생산기지인 주변 지역을 허문다고? 많은 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소공인들과 연대하고 저항했지만, 그중에 단연 앞장섰던 이들은 오늘 소개할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이하 보존연대)’.

 

보존연대는 연구자와 예술인 그리고 지역의 활동가들이 모인 단체다. 이곳 산업 생태계를 지키기 위해 이들이 전략적으로 삼은 수단이 바로 기록이다. 새벽같이 시작되는 강제집행을 막고, 행정과 씨름하고, 시행사의 편법·불법을 고발하고, 한창 재개발이 진행 중인 현장이라 당장 발등의 불을 끄기에도 정신이 없는 상황이지만, 이들은 경이로울 정도로 기록에 공을 들였다.

 

홈페이지 청계천, 을지로, 산업 생태계(social-capital.cheongyecheon.com)는 이들이 그간 이 일대를 기록하고 조사한 기록 중 이곳의 산업 가치를 알리기에 적합한 자료들을 모아놓은 사이트다. ‘산업 생태계’ ‘사회적 자본’ ‘다방 이야기라는 카테고리 아래 이곳 소공인들의 네트워크를 드러낼 수 있는 다양한 시각 자료들을 갖춰놓았다. 공장별로 거래처들을 포물선 다발로 표시해 놓은 것을 보면 이곳 소공인들이 얼마나 촘촘하게 엮여 있는 생태계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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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가 제작한 ‘청계천, 을지로, 산업 생태계’ 홈페이지 

 

이 작업에 참여한 보존연대의 아키비스트 안근철 연구원은 자료를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록을 가시화할 스토리라인을 작성하고, 기록을 어떠한 장르의 콘텐츠로 만들지가 중요하다라고 한다. 특히 청계천, 을지로처럼 이곳을 지켜야 할 이유를 공론화시키는 것이 목적일 때는 더욱 그렇다.

 

이들의 노력 덕분에 나 역시 도심 제조업이 무엇인지, 청계천과 을지로 일대가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알게 되었다.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2019년 청계천 일대 보호를 위한 여론이 일어나고, 2020년 관리처분 인가가 난 곳을 제외하고 많은 부분을 재정비촉진지구에서 해제할 수 있었던 데에는 바로 이들이 진행한 기록의 힘이 크게 미쳤을 것이다.

기록은 보존연대 구성원들 스스로를 바꾸어놓았다. 사실 이들이 처음 이곳에 발을 들이게 된 계기도 오래된 공장을 기록하는 프로젝트 때문이었다. 연구자로 기록하러 들어왔다가, 재개발에 모두 허물어진다는 얘기에 주민이 되었다. 스스로 주민이 되었기에 수십 년 전부터 소공인이 쓰던 장부, 장인의 손과 같은 오래된 공구들, 외부의 연구자들에게는 쉽게 꺼내놓지 못하는 구술까지기록자와 장인들 간에 쌓인 믿음이 없었다면 철거와 함께 사라졌을 자료들을 모을 수 있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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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존연대가 소공인들에게 받은 자료들  


지난 글에서 동네를 산책하듯, 수다 떨 듯, 보물 찾듯이 기록하자고 하면서 떠올렸던 것도 바로 이들이었다. 재개발이라는 다급한 상황이지만, 기록에 임하는 이들의 호흡은 차분하기만 했다. 마치 당장 내일 강제집행이 들어와도 오늘 주문을 해소하기 위해 묵묵히 기계를 돌리는 소공인들을 닮았다. 주민들의 삶에 기어처럼 맞물린 기록자이기에 호흡도 서로 닮아가는 걸까?

 

보존연대의 안근철 연구원은 요즘 소리를 채집하고 있다. 청계천 일대의 시각, 촉각에 이어 청각까지, 모든 감각을 아우르는 기록에 도전하고 있다. 만나서 대화를 하다가도 공장 옆 무성한 가지 사이에서 새소리가 들리면 조용히 녹음기를 켠다. 그제야 나도 도심 한복판에서 새소리를 들을 수 있음에 신기해한다.

안근철 연구원은 기록은 특별한 작업이라기보다 내가 생활하는 곳의 주변을 세심히 살펴보고 관심을 갖는 것이라고 말한다. 느린 걸음, 세심한 눈길로 지역을 거닐며 만나는 우연한 발견과 재미야말로 이들이 계속 지역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아닐까 싶다.


최대혁 OO은대학연구소 대표

Ruta
OO은대학연구소 대표 | 세운협업지원센터 공동센터장
도시재생 현장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도시재생이 되었든 마을만들기가 되었든 문화도시가 되었든 첫 단추는 ‘마음 만들기’라는 생각이 부쩍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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